여기서 돌아 다니다 보면, 그리고 학교 친구들 (엄마들도 있음) 과 얘기를 하다보면 호주 엄마들은 한국의 엄마들 냄새랑은 조금 다르다. 내가 여태까지 봐 왔던 10대의 아이들을 가진 우리 나라 엄마들은 조금 억눌려 있었는데 여기있는 엄마들은 좀 다르다. 배우고 싶은거 다 배우고 (학교까지 다닐 정도니까) 놀고 싶은데로 논다. 그렇다고 역마살 낀 사람처럼 애고 가정이고 집어 치우고 돌아 다니는건 아니고 그만큼 애들만큼 남편만큼 자기 자신도 중요 하다는게 눈에 보인다. 그에 비해 우리 나라 엄마들은 자기의 인생보다 애들 미래가 우선이고 남편 내조가 우선이다.
그런데 애들이 20대가 되니 우리네 또래를 가진 엄마들이 슬슬 풀리고 있는걸 느꼈다. 40대 후반부터 50대초인 한국엄마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신기한건 예전에는 그냥 에이 엄마들이 뭘. 이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관심 갖지 않았었다. 특히 남의 엄마들은 더) 나도 나이를 먹는건지. 아니면 이제야 드디어 나도 한국 엄마들의 깊은 마음을 느끼게 된건지. 요즘엄마들은 상당한 분위기를 풍긴다.
여자는 나이를 먹으면서 더 열정적으로 변한다는 말이 사실인걸 증명해 주듯 요즘 엄마들은 내가 10대 였을때 보다 더 생기있고 열정적이다. 주름살은 그저 세월은 흔적일 뿐이고 하고자하는 마음은 20대인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
한국의 분위기상 결혼하고 나서 남편과 애들 뒷바라지에, 집안일에 거의 30년을 억눌려서 살다가 이제야 빛을 보려고 조금씩 조금씩 한발 한발 내딛는 엄마들의 글, 그림 혹은 음악은 세계 어느 여자들보다 풍부하고 깊다. 평생 작가로써만 살아온 그런 위대하지만 어찌보면 편협한 작가들에게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은유법이라던가 그들만의 표현이 있다. 한국엄마들만의 슬픔이나 외로움들은 그 삶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알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말을 갑자기 쓰는건 몇년전부터 지수네 어머니께서 다시 글을 쓰신 것 들이 잡지에 실리게 되어 나도 읽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몇작 못 읽어봤지만 나는 지수 어머님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더 좋은글을 계속해서 쓰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중에 책도 내셨으면좋겠다.!
* 밑의 글은 에세이플러스 라는 수필지에 실린 지수 어머님 (이 완숙) 의 글. 좋아서 첨부.
레몬같은 슬픔
이 완숙
정제된 슬픔의 무게는 얼만큼일까.
쏟아낸 눈물만큼의 무게일까.
어슴프레한 배경을 뒤로하고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키가 훤칠한 남자가 느릿느릿 지나쳐갈 때 어둠 속에서 그의 슬픈 눈동자와 마주쳤다.
화선지에 먹물이 젖어오듯이 슬픔이 전해져온다. 느닷없이 그 슬픔을 나누어 갖고 싶단 생각이 든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작은 아이는 학원가방을 메고 주먹을 입에 가져다 대며 소리 죽여 울고 있다.
무언가, 저 슬픔은.
무어라 할까?
슬픔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던 것이다.
-죠오지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중에서.
내 안에 슬픔이 있었던가.
레몬을 처음 입에 대었을 때 신경을 긁는 것처럼 신 그 맛의 정제된 슬픔들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오랫동안 시고 순수한 슬픔 속에 잠겼던 때가 있었다.
몇날며칠을 그 슬픔을 밀납으로 만든 레몬을 손에 쥐고 다니듯이 갖고 다녔다.
그대가 내게 한 거절의 말을
나는 손바닥에 갖고 다닌다.
희끄무레한
밀납으로 만든 레몬인양
-가르샤 로르까, <그는 새벽에 죽었다> 중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을, 노래를, 말들과 추억을 잊어야 한다는 건 슬프고 슬픈 일이었다.
하늘과 나무가, 꽃과 온 세상이 그 슬픔 속에 있어서 몸안의 모든 세포들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아주 시고 씁쓸한 슬픔. 그 슬픔에는 쓰라림과 함께 레몬 같은 향내가 있었다.
그러나 삶이란 새콤하고 순수한 레몬의 맛은 아니었다. 육즙과 온갖 야채가 버무려진 육개장의 맛이거나 뼈를 욹어낸 진하고 탁한 뼈국물에 더 가까웠다. 미각은 뒤범벅된 비빔밥에 익숙해져 가고 일상의 삶도 얽히고 섞여서 존재한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내 맘대로 조정하고 조율하며 버리거나 가해를 할 수도 있는 입장이 되었다. 더 이상 그 뒤엉켜진 세상에서 별반 푸르게 슬퍼할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굳어진 마음에는 레몬처럼 시고 순수한 슬픔이란 찾아오지 않았다.
야채가게에서 한 편에 세 개씩 묶여 포장되어 있는 레몬에 늘 눈길이 머무는 것은 비빔밥의 미각으로 대표되는 모든 일상에 대한 잠재적 반발심에서 이다.
육즘을 짜내는 듯한 욕심에서 시작되는 고통스런 슬픔이 아니라 가슴 속 깊이 푸른 빛으로 맑은 물 되어 흘러나는 먹먹한 슬픔을 찾고 싶은 것이다.
손끝이 아프도록 단단히 현을 조인 슬픈 높은 음을 듣고 싶다.
굳은 살로 무뎌져버린 감성에 예민한 각을 세우고 싶은 것이다.
출처: http://www.getough.com/